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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릴 땐 고기광, 어느덧 채식 40년”-박소연 케어 대표
  • 2018.02.22.
[리얼푸드=고승희 기자] “엄마, 두부! 두부 주세요!”

‘카봇’ 티셔츠를 멋지게 차려입은 네살박이 꼬마 아가씨가 동물권 단체 케어(care)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박소연(48) 케어 대표의 딸 노아 양이다. 국내 비건(Vegan) 인구는 대략 50만명. 노아 양은 그 중에서도 극소수일 ‘모태 비건’이다. 비건은 가장 엄격한 단계의 채식주의자다. 두부 대신 어르신(?) 취향의 곡물 과자를 건네자 인형 같은 미모를 뽐내며 금세 웃는다. “엄마, 나 이거 좋아해!”

“비건 캠프에 갔다 오는 길이라 배가 좀 고픈가봐요. 간이 돼있거나 자극적인 음식은 절대로 안 먹을 만큼 입맛이 까다로워요. (웃음) 과자도 비건 과자만 먹고, 두부도 생으로 먹거나 데친 것만 먹어요.” 네 살 치고는 범상치 않은 입맛이다. ‘모전여전’이다.

찬 바람이 매섭게 불던 날, 서울 경복궁 인근 골목길 외딴 곳에 자리한 케어 사무실에서 박소연 대표를 만났다.

지난 2002년 동물사랑실천협회로 출범한 케어는 2015년 ‘동물권 단체’로 다시 태어났다. “동물보호라고 하면 사람이 동물보다 우위에 있고, 수혜를 받는 대상이 동물인 듯한 어감을 주기도 하더라고요. 이제는 동등한 생명권으로 바라보자는 의미에서 동물권 단체라고 하게 됐어요.” 활동가로 살아온 지난 시간 동안 무수히 많은 일들이 스쳐갔다. 박 대표를 만나 지난 이야기를 들었다. 
박소연 대표는 “케어가 하는 일은 ‘동물들의 대변자’가 되는 것”이라며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 언제나 동물의 편에 서고 있다”고 말했다.

▶ ‘케어’의 시작…“고기만 찾던 유년시절”=박소연 대표에겐 지금도 잊히지 않는 ‘인생의 두 장면’이 있다. 그 ‘결정적 장면들’이 박 대표의 삶을 송두리째 바꿨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채식주의자로 살아온 지 어느덧 40년. 하지만 날 때부터 채식주의자는 아니었다. 어린 박 대표는 누구보다 ‘고기’와 ‘동물’을 사랑하는 소녀였다. 딸 노아가 두부를 찾듯이 박 대표는 ‘고기’를 찾았다.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어린 시절이죠. TV에 동물이 나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동물을 사랑하면서도 엄마한텐 ‘고기, 고기’ 노래할 정도로 고기 광이었어요.” 그 때엔 “내가 먹는 것이 생명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 했다”고 한다.

그러다 ‘사건’은 초등학교 입학 이후 벌어졌다. 등굣길 어머니와 함께 시장통을 지나던 중 자주 가던 정육점 앞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정육점에서 천장에 뭔가를 ‘턱턱턱’ 매달고 있는 모습을 본 거예요. 팔다리가 축 늘어져 있더라고요. 엄마한테 ‘저게 뭐냐’가 물었더니 ‘그게 네가 좋아하는 고기야’ 하시더라고요.”

박 대표는 “엄청난 충격이었다”는 말로 당시를 떠올렸다. 여덟 살이 된 꼬마는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했다고 한다. “그때 이후로는 고기를 먹을 수가 없더라고요.”

그날의 기억은 박 대표의 많은 것을 바꿨다. 채식주의자가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어린 아이는 유난스럽게 고기를 거부했다. 매일이 ‘전쟁’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많은 부모들은 아이들이 고기를 먹지 않으면 영양이 부족할 거라도 생각하시잖아요. 키도 안 크고, 체질도 약하고, 잔병치레가 많을 거라고요.” 하지만 박 대표는 물론 딸 노아 역시 비건으로 살면서 감기도 잘 걸리지 않았고, 배앓이도 없었다. “당시 저희 부모님도 간섭이 많았고, 구박도 심하셨어요. (웃음) 이거 먹으면 용돈 준다고 유혹도 하셨고요. 몰래 먹이려고도 하셨죠. 근데 냄새만 맡아도 다 아니까 울고 불고 난리였죠. 그러다 타협을 보고 생선이나 달걀 흰자 정도는 먹었어요. 그 때까지 비건은 아니었어요.” 박 대표가 비건이 된 것은 10여년 전의 일이다. “채식을 시작하는 계기는 모두 다르지만, 결국 동물권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 비건으로 가기까지는 쉽지 않아요.” 
박소연 대표는 “케어가 하는 일은 ‘동물들의 대변자’가 되는 것”이라며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 언제나 동물의 편에 서고 있다”고 말했다.

▶ 동물에 대한 시선의 변화…뮤지컬 배우에서 활동가로=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동물을 바라보던 시선도 달라졌다. 시골에 가면 소의 배 밑에 고드름이 달려 있고, 코뚜레를 한 모습만 봐도 ‘괴로움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여름 피서철 동네 강아지들이 굶고 있는 모습을 보면 집밥을 퍼다 나르기도 했다. 그러면서 박 대표는 ‘동물 운동가’를 꿈 꿨다.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소시민인 부모님은 ‘활동가’가 된다는 딸을 감당하기 힘들 것이라는 우려가 가슴에 깊이 박혔다. 20대 초반 대학을 다니다 그만 두고 가지게 된 직업은 ‘뮤지컬 배우’였다.

“그 땐 돈을 많이 벌어 동물 보호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다고 많이 번 것도 아니었지만요. (웃음)” 박 대표는 무려 10년간 무대에서 배우로 관객과 만났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난타’. 배우 류승룡 김원해와 함께 활동한 ‘난타’의 초창기 멤버였다.

두 번째 전환점은 이 무렵이다. 우연히 명동에서 한 남자가 ‘개고기 반대’ 서명을 받는 모습을 마주하게 됐다. 서명을 한 뒤 집으로 돌아온 박 대표는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사람은 왜 혼자서 이걸 하고 있을까 싶었죠. 결국 만나자고 해서 물어봤어요. 아무도 함께 할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돈을 많이 번다고 되는 일이 아니구나 싶었어요. 직접 나서서 돕지 않으면 안 되는 거구나 생각했어요.”

그때부터 박 대표는 자원봉사 활동을 시작했고, 조직까지 만들게 됐다. 당시 만난 사람은 다른 동물단체의 대표로 활동 중이다. 지난 16년, 케어 설립 이후 많은 일이 있었다. 주로 구조, 입양, 법 개정과 관련한 일을 많이 하고 있다. 2011년경 돼지 생매장 현장을 목격했을 때는 한 달간 트라우마에 시달렸다고 한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는 잔인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어요.” 당시 상황을 폭로한 이후 돼지 생매장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2006년 장수동 개지옥 사건 때는 ‘절도죄’를 무릅쓰고 구조에 나섰다. “많은 개 농장이 대부분 열악하고 비인도적이죠. 당시 그 안에서 매일같이 개들이 죽어나가고 있었어요.” 이 시간을 계기로 15년 만에 법 개정이 이뤄졌다. 케어의 활동으로 학대자에 대한 징역법이 신설됐고, 벌금형이 강화됐다. 동물들에 대한 격리조치, 피난권도 생기게 됐다.

“아직 갈 길이 멀어요. 동물 학대 사건에 대한 인식 전환이 필요해요. 사람과 피해 당한 동물의 사건으로 보지 않고, 사람이 물건을 다루다가 생긴 일이라고 바라보는 인식이 커요. 무엇보다 사법부의 인식이 달라져야 해요. 사람 중에도 약자가 있지만, 그보다 더 생물학적 약자는 동물이에요. 케어의 정신은 그래서 ‘동물들의 대변자’가 되는 일이에요. 저희는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 언제나 동물의 입장에서, 끝까지 동물의 편에 서는 사람들이에요.”

shee@heraldcorp.com 
사진=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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