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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구의 역습, 식탁의 배신]<농산편①>“여름 배추가 사라진다”
  • 2018.01.31.
- 뜨거워진 한반도, 여름 배추 생산량 반토막
- 가뭄, 폭염 등 이상기후에 배추도 녹아
- 기온 상승에 신종 병해충 기승
- 강원도 배추 사라지고 재배적지 개마고원으로 북상

[리얼푸드=(제주ㆍ태백) 고승희 기자] ‘하늘 아래 태백’이라는 말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 강원도 태백은 구름도 바람도 쉬어가는 곳이다. 여름이면 이곳 매봉산 아래로 푸릇한 배추들이 넘실댄다. 해발 700m에서 1250m에 이르는 이 지역이 바로 고랭지(高冷地) 배추의 주산지다. 매봉산 배추는 대한민국 배춧값을 쥐고 있다. 이곳에서 우리나라의 한 해 배추 가격이 정해진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매봉산 마을은 요즘 시름이 깊다. 이정만 태백 매봉산 영농회장은 “예전엔 날씨가 추워 한여름 배추농사가 어려울 때도 있었는데, 이젠 너무 더워져 농사가 어렵다”고 말했다. 생산량이 해마다 줄고 있다. 이상기후 때문이다. 그는 “강수량이 적어 가뭄이 극심한 데 폭염도 함께 오고 있어 걱정”이라고 토로했다.

배추밭은 봄이 오면 본격적으로 몸을 푼다. 5월부터 모종을 심고, 8~9월 수확에 돌입한다. 이 짧은 3~4개월이 ‘전쟁’과 다름없다. 경사진 밭이 바짝바짝 마른다. 폭염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금싸라기 ‘여름 배추’의 위기다. 가뭄, 폭염, 폭우로 이어지는 이상기후는 ‘밥상 물가’를 위협하는 주범이다. 지난 몇 해 사이 기후변화를 체감한 강원도는 여름마다 한숨이다. 이 회장은 “해마다 가뭄과 폭염이 반복되니 생산량이 걱정이고, 배추 가격 파동이 생길 거라 생각하면 심란하기만 하다”고 말했다.

여름에도 선선한 기후를 유지하는 강원도 태백은 ‘고랭지 배추’의 주산지다. 50년 전부터 배추 농사를 지어온 매봉산 마을은 기온 상승으로 배추 농사에 타격을 입고 있다. [태백 매봉산 영농회 제공]


▶ 뜨거워진 매봉산…여름 배추 생산량 반토막=우리나라는 철마다 배추 재배지가 정해져 있다. 여름 배추는 태백과 대관령 등 고랭지에서, 김장철 가을 배추는 해남에서, 월동 배추는 제주와 남해에서 주로 생산한다.

기온 상승은 ‘고랭지 배추’를 위협한다. 기상청에 따르면 2017년 우리나라의 연 평균 기온은 13.1℃. 평년(12.5℃)보다 0.6℃가 높았다. 문경환 농촌진흥청 온난화대응농업연구소 연구관은 “한반도는 지난 100년 간 평균기온이 1.5℃가 오르며 꾸준한 기온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며 “이로 인해 농업 생산환경이 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작물의 재배시기는 물론 수량, 품질에도 영향을 미친다.

김갑수 태백시 농업기술센터 주무관은 “태백과 백두대간은 전국 여름 배추 재배지의 90% 이상을 차지한다”며 “그런데 기온 상승으로 저지대부터 재배 면적과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줄고 있다”고 설명했다.

과거 강원도는 고랭지 배추 농사에 최적화된 환경이었다. ‘저온성 작물’인 배추는 서늘한 기후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매봉산 마을에선 보통 해발 700m부터 1000m에 이르는 지역에서 배추 농사를 짓는다. 산을 개간해 여름 농사를 시작한 것이 50년 전. 한 때는 ‘여름 배추’로 호황을 이뤘다. 매봉산 영농회에 따르면 40만평(약 132㏊)에 달하는 마을의 배추밭에선 5t 트럭 1300~1500대를 꽉 채울 만큼의 배추가 생산됐다. 트럭 한 대에 배추 3000포기가 차곡차곡 쌓였다.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김 주무관은 “배추는 22~25℃가 재배 적온이라 30℃ 이상이 올라가면 재배가 쉽지 않다. 이젠 태백에서도 30℃ 이상 올라가는 일이 많다”고 말했다. 해발 1200m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이 회장은 “해마다 생산량 추이가 다르지만 날씨가 점점 더워지고 있는 몇 해간 작황이 아주 좋지 않다”고 했다.

지난해 생산량은 급격히 줄었다. 이 회장은 “3000평(약 1㏊) 기준으로 5t 트럭 10대 정도는 나와야 하는데 작년에는 세 대 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태백시 전체의 평균치도 좋지 않다. 태백시 농업기술센터의 내부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생산량은 트럭 5~6대 정도였다. 김 주무관 역시 “1㏊당 평년 작황은 70톤이었다”고 말했다. 생산량이 줄어드니 ‘배추 대란’이 나올 수밖에 없다. ‘금(金)추’가 등장하는 이유다.

태백 매봉산 마을의 배추 생산량은 평년엔 1㏊당 5t 트럭 10대에 달했지만, 지난해엔 절반 이하로 줄어버렸다. [태백 매봉산 영농회 제공]


▶ 이상기후로 상품가치 뚝…배추가 녹는다=생산량은 물론 품질도 문제다. 이상기후로 상품가치는 뚝 떨어진다. 이정만 회장은 “지난해엔 생산량도 줄었지만, 수확한 배추도 ‘하품’(下品)이었다”고 말했다.

그 해의 기온와 강수량은 배추 농사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기상청에 따르면 지난해 한반도는 가뭄과 국지성 집중호우, 폭염으로 몸살을 앓았다. 배추 모종을 심기 시작하는 5월 전국 평균 강수량(29.5㎜)은 평년(101.7㎜) 대비 29%로, 1973년 이래 두 번째로 적었다. 6월(60.7㎜)은 평년(158.6㎜) 대비 38%였다. 이 회장은 “예전엔 물을 주지 않고도 농사를 지었는데 이제는 다르다”며 “가물 때는 배추 농사에 하루 1000t 가량의 물이 필요한데 1200m의 산 정상에선 물 공급이 원활하지 않다”며 어려움을 호소했다.

극심한 가뭄을 이겨내자 폭염이 찾아왔다. 지난 7월 전국 평균 기온은 26.4℃로 평년(24.5℃)보다 1.9℃ 높았다. 폭염 일수는 6.4일로 기록됐다. 2016년 7월 폭염일수 5.5일보다 많고, 평년(3.9일) 대비 1.5배 가량 많았다. 특히 강원 영동 지역을 중심으로 폭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폭염은 배추를 물러지게 하는 등 품질 저하의 주범이다. 이 회장은 “기온이 올라 날씨가 더워지다 보니 80~90% 이상이 수분인 배추는 녹아내리거나 썩어버린다”고 말했다. 난데없는 폭우도 골치다. 기상청에 따르면 태백 지역은 8월 들어 17일 동안 비가 내렸다. 잦은 비로 배추는 흐물거리기 일쑤였다.

병해충도 기승이다. 문경환 연구관은 “기온 상승으로 기존 병해충이 사라지는 경우도 있지만 외래 유입종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태백에도 이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김갑수 주무관은 “고온에 따른 바이러스와 새로운 선충병이 배추에 발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직 외래 병해충을 잡을 약제 개발은 이뤄지지 않았다. 대신 태백시 농업기술센터에선 병의 밀도를 줄일 수 있는 작물(화이트 머스타드)을 공급하고 있으며, 방제 작업과 예방 차원의 도비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기온 상승으로 강원도의 고랭지 배추 재배면적이 나날이 줄어들고 있다. 2090년이 되면 0㏊가 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여름배추, 결국엔 사라진다= 한반도의 기온 상승은 농작물 지도를 완전히 바꾸고 있다. 문경환 연구관은 “미래가 되면 한반도 기후가 제주도 해안처럼 변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며 “가장 큰 우려는 재배 작물이 영향을 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문 연구관은 작물의 재배치 과정에서 “여름 배추는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고 봤다. 농촌진흥청에 따르면 고랭지 배추 재배면적은 해마다 줄었다. 2000년 1만206㏊에 달하던 광활한 면적은 2005년 6502㏊로 줄었다. 2015년엔 4721㏊였다. 지난해는 4676㏊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한국 기후변화 평가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10년(2001∼2010년) 사이 한반도의 기온은 0.5℃가 상승했다. 이 같은 추세가 이어진다면 30여년 후인 2050년 강원도의 고랭지 배추 재배면적은 256㏊, 2090년이 되면 0㏊가 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문 연구관은 “고랭지 배추의 생산량은 날씨 의존성이 큰데 여름철 폭염 등 기후변화로 생산이 불안정해지면 결국 재배가 힘들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문제는 태백과 같은 고랭지 배추 재배 지역은 대체작물이 없다는 점이다. 김 주무관은 “해발 고도가 높은 지역적 특성상 배추 외의 다른 작물을 재배하지 못해 배추 농사를 망치면 수익을 내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농민들의 근심 걱정이 나오는 이유다. 이 회장은 “배추가 살아야 우리도 먹고 사는데, 생산성이 안정적이지 않아 모두가 빚을 안고 살고 있다”며 한숨을 쉬었다.

일각에선 향후 10~20년 뒤엔 고랭지 배추의 적지가 개마고원까지 올라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문 연구관은 “온난화로 강원도 지역의 고랭지 배추 농사가 어려워지는 건 피할 수 없으며, 현재의 품종으론 재배가 더욱 힘들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고랭지에서도 적응할 수 있는 고온에 강한 품종 개발은 이뤄지지 않았다. 김 주무관은 “토지 개선과 병해충의 사전 방제 위주로 대처하며 생산량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shee@heraldcorp.com

※이번 기획보도는 삼성언론재단이 공모한 기획취재 지원사업 선정작입니다.

*리얼푸드 특별취재팀=권남근(팀장)ㆍ고승희ㆍ육성연ㆍ박준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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