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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술이 사람 삼키는 연말 ①] 필름이 끊겼다?…뇌가 약해졌다는 경고입니다
  • 2017.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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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년회 등 잇단 술자리에 알코올 중독 걱정
-“‘블랙 아웃’, 단기 기억상실…잦아지면 조심”
- “음주문화 개선, 최고의 알코올 중독 예방법”

지난해 12월 회사원 오모(48) 씨는 송년회를 핑계로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올해 초까지도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술 약속을 잡았다. 당시 오 씨는 아내와 딸이 해외에 있는 ‘기러기 아빠’였다. 그는 “술을 안 마시고 맨정신으로 집에 일찍 가면 허전하고 할 일도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중요한 업무상 회의를 깜빡했다. ‘안되겠다’ 싶어 병원을 찾은 오 씨는 알코올 중독(알코올 의존증) 진단을 받고 1년 가까이 치료 중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연말이 왔다. 얼마 전까지 깨끗했던 12월의 다이어리도 어느새 송년회 등 ‘술 모임’으로 가득 찼다. 해마다 이맘때면 주 4회 이상 술을 마신다는 이른바 ‘주사파’를 자처하는 주당도 주변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렇게 술을 마시다 ‘혹시 알코올 중독 아닐까’라며 걱정해 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얼마나 많이ㆍ자주ㆍ오래 마셔야 오 씨처럼 알코올 중독에 걸리는지 궁금해한다.

이에 대해 박진영 강남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주량은 연령, 체질, 성별 등 개인 상황에 따라 많은 차이가 난다”며 “술 마시는 횟수나 양에 상관없이 일단 술로 인해 자신과 가족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알코올 중독을 의심해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술로 인해 여러 가지 신체적ㆍ정신적인, 가족이나 사회생활의 문제들이 생겨도 술을 끊거나 조절하지 못하고 계속 마신다면, 이것이 바로 알코올 중독”이라고 덧붙였다.

▶“‘블랙 아웃’, 알코올성 치매 야기 가능성”=술을 많이 마신 뒤 이른바 필름이 끊긴 경험을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알코올이 뇌 등 중추신경계에 미치는 영향 중 하나가 바로 기억 상실이다. 필름이 끊기는 것을 이른바 ‘블랙 아웃’이라고도 한다.

박 교수는 “‘블랙 아웃’은 술이 취한 상태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기억 상실을 말한다”며 “어떤 사람이 술을 마시다가 혈중 알코올 농도가 일정 수준에 도달하는 순간부터 시작해 술이 점차 깨며 다시 그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질 때까지 기간 동안의 기억이 없어지는 현상을 말한다”고 설명했다.

‘블랙 아웃’을 경험한 사람은 술이 깬 뒤 일정 기간 동안의 기억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동안에 다른 사람을 해쳤거나, 다른 사람에게 이상한 행동이나 수치스런 짓을 했을까봐 대단히 두려워하고 고통스러워하게 된다. 이 같은 기억 상실에 빠진 사람에게 직업, 주소, 주민등록번호 등을 물어보면 잘 기억해 낸다. ‘블랙 아웃’ 기간에도 장기 기억이나 지능은 상대적으로 온전하다는 의미다.

그러나 5~10분 전 있었던 일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조금 전 자신이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또 시켰던 술을 또 시키는 행위를 하게 된다. ‘블랙 아웃’ 기간 동안 단기 기억이 상대적으로 많은 손상을 입는 것이다. 컴퓨터로 문서를 작성할 때 5분 간격으로 입력한 내용을 계속 저장했는데, 컴퓨터의 저장 기능이 일정 기간 동안 작동하지 않아 완성 후 해당 문서 파일을 다시 열어 봤을 때 저장 기능이 고장 나 었던 그 기간 동안 입력했던 내용이 남아 있지 않게 되는 것과 같은 원리다.

‘블랙 아웃’은 뇌가 약해졌다는 신호로, 알코올 중독자는 증세가 악화되면서 ‘블랙 아웃’을 겪는 횟수가 잦아지게 된다. 박 교수는 “술을 많이 마시면 알코올이 대뇌의 해마와 측두엽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기억의 화학적 저장을 방해, 필름이 끊기게 된다”며 “뇌가 약해지며 손상을 입으면 알코올성 치매에 걸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기억력이 점차 떨어지고 ‘블랙 아웃’ 횟수도 잦아진다면 정말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알코올 중독 가족력 있다면 술 마시지 말아야=알코올 중독을 예방하고 ’블랙 아웃‘ 증상도 겪지 않으려면 건전한 음주 습관을 가져야 한다. 건전한 음주란 음주 횟수나 양보다 음주로 인해 야기되는 결과에 달려 있다. 박 교수는 “스스로 음주를 조절할 수 있다면 건전한 음주라고 할 수 있다”며 “나아가 적당한 음주로 적절한 스트레스 해소와 사회적 대인관계를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2차, 3차…’ 식으로 술자리 회차를 늘리는 행위는 건전한 음주는 아니지만, 이를 알코올 중독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박 교수는 “적당히 즐겁고. 행동이 흐트러지지 않고, 다음날 업무에 지장이 없을 수준이 적당한 음주라 할 수 있다”며 “술을 마신 뒤 사고나 판단이 흐려지고 기억력이 감퇴된다면 (알코올 중독)위험성이 커질 수 있다”고 했다.

서양에서는 건강한 사교적 음주의 기준을 술의 종류에 상관없이 일주일에 남성은 14잔 이내(한 번에 4잔 이내), 여성은 7잔 이내(한 번에 3잔 이내)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현재 음주 문제가 없거나, 알코올 중독의 가족력이 없는 사람에게만 해당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음주를 절대적으로 피해야 한다.

박 교수는 “현대 정신의학에서 알코올 중독은 유전적 인자가 있는 사람이 술을 자주 많이 마실 때 발현하는 뇌 질환으로 정의한다”며 “가족 중 (알코올 중독)환자가 있다면 지금은 비록 건전한 음주를 한다고 하더라도 향후 알코올 중독으로 발전할 위험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만일 자신이 알코올 중독자라면 이를 스스로 인정하고, 치료를 시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치료를 통해 알코올이 야기하는 여러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배우자 등 가족이 협조ㆍ참여하면 치료에 도움이 된다. 박 교수는 “대부분 환자는 가벼운 금단 증상만을 경험하기 때문에 바로 외래 진료를 통해 상담과 약물치료를 받을 수 있다”며 “음주에 대한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교정을 위한 인지 행동 요법을 받을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알코올 중독의 최고 예방법은 음주 문화의 개선이다. 박 교수는 “잇단 송년회 등 술에 관대한 문화가 음주운전 등 각종 범죄와 가정폭력, 아동학대 등 심각한 가정 문제를 야기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며 “음주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맹목적 온정에서 적절한 규제로 변화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신상윤 기자/ken@heraldcorp.com

<알코올 중독(알코올 의존증) 진단 기준>
▶원하는 음주 효과를 얻기 위해 술을 점점 더 많이 마셔야 하는 경우
▶땀, 맥박 수 증가, 손 떨림, 구역질, 안절부절 등 금단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
▶의도했던 것보다 더 많은 양의 술을 먹거나 장기간 마시는 경우
▶술을 끊거나 조절하려는 마음이 있거나, 실제 노력해도 성공하지 못한 경우
▶술을 먹기 위해, 술을 마시는 데, 술을 깨는 데 많은 시간이 소모될 경우
▶술 때문에 중요한 사회적ㆍ직업적ㆍ휴식 활동 등을 줄이거나 포기하는 경우
▶술로 악화될 가능성이 있는 신체적ㆍ정신적 문제에도 술을 계속 마시는 경우
*위 증상 중 3개 이상이 동시에 나타나면 알코올 중독. 자료:미국정신의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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